소설

그 남자의 흔한 이야기 Part 1-13(첫사랑 편)

느루 2022. 2. 23. 00:11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며 작가의 허락 없는 복사, 불법펌 등을 금지합니다.

 

교도문고에 들어가니 수 많은 책들이 우리를 반겼다. 가람이와 나는 수험서가 있는 쪽으로 갔다. 나는 언어영역과 관련된 책을 같이 고르기 위해 이것저것 뒤져봤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내가 봤던 수험서들을 가람이에게 추천해줬다. 그리고 내가 썼던 오답노트를 보여줬다. 어떻게 수험서를 쓰는게 좋을지 오답노트를 보면서 설명해줬다. 

 

 

나는 교도문고 의자에 앉아서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것도 있고...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기뻤다. 그리고 그걸 재밌게 듣는 가람이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수험서를 고르다보니 가람이도 말이 많아졌다. 순수하게 도와주는 내 모습에 마음이 열렸는지, 나에게 본인의 학창시절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말해줬다. 그 와중에 종종 웃는 가람이의 모습이 예뻐보였다. 하얀 얼굴에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교도문고에서 1시간 반정도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아는 정보의 대부분을 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저녁을 먹으러 갈 것을 제안했다.

 

 

(나) "이정도면 언어영역 관련해서는 대충 정리된 거 같은데?"

 

(가람) "어, 맞아맞아. 설명을 잘 해줘서 앞으로 공부할 때 진짜 도움 많이 될 것 같아. 고마워~ 다온아."

 

(나) "아니야,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거 설명한거지 뭐. 그럼 이제 저녁 먹으러 갈래?"

 

(가람) "그래, 좋아!! 뭐 먹을까? 네가 오답노트도 주고 했으니까 내가 살게."

 

(나) "어? 어....(순간 고민한다.) 그래. 내가 주변 음식점을 좀 찾아봤는데 근처에 일본식 돈까스랑 스시집이 괜찮은 데가 있더라고. 혹시 둘 중에 먹고 싶었던 거 있어?"

 

(가람) "음...최근에 스시를 먹어서...그럼 돈까스 먹으러 갈까?"  

 

(나) "좋아, 그럼 돈까스 집으로 가자. 나만 따라오면 돼!"

 

(가람) "좋아, 가자." 가람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돈까스 가게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가람이는 교도문고에서부터 말문이 틔였는지 가는 도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계속 했다. 나는 가람이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가람이는 중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미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미술을 하다보니 처음에는 재밌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예술가라는 직업 자체가 미래도 불투명하고 미술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기 때문에 이걸 계속 하는게 맞는 지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래도 최대한 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답을 했다. 대답을 위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람이가 원하는 대학에 가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긍정적인 말들이 저절로 나왔다. 평소 나는 약간 시니컬하게 말하는 편인데 신기하게도 가람이 앞에서는 그런 모습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돈까스 집에 도착했다. 가람이는 히레까스를, 나는 모듬까스를 시켰다. 돈까스를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했다.

 

 

(나) "오, 여기 맛있다. 다행히 찾아서 온 보람이 있네. 어때? 입에 좀 맞아?"

 

(가람) "응, 완전 맛있어. 고기가 엄청 부드럽네. 너도 먹어봐."

 

(나) "엇, 그럼 나는 모듬이니까 생선이랑 로스까스 한번 먹어봐. 이것도 맛있어."

 

(가람) "음~ 맛있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어? 맛집 다니는 거 좋아하는 편이야?"

 

(나) "그냥 검색하니까 나오던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 그리고 맛집 다니는 거 엄청 좋아해. 기왕 나가서 사먹는 건데 맛있는 거 먹었으면 해서..하하. 그렇다고 입맛이 막 까다롭고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약간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한다.

 

(가람) "오~ 그럼 맛집 많이 알겠네. 나도 맛있는 거 먹는 거 좋아하긴 하는데...막 찾아서 다니는 편은 아니야."

 

(나) "그럼 나랑 같이 다니면 될걸? 맛있는 거만 찾아다니까 적어도 뭐 먹을 때는 기분 좋을거야. 하핫."

 

(가람) "진짜. 그러겠네. 부럽다. 서울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있고...."

 

(나) "에이, 왜 그래. 너도 곧 나처럼 될거야. 그냥 시간이 조금 늦춰지는 거니까."

 

(가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네. 나도 대학교 가서 미팅도 해보고 좀 놀아보고 싶다~"

 

(나) "미팅? 왜? 남자들이랑 놀고 싶어?"

 

(가람) "그냥...뭔가 원해서 미술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가 적성에 맞는 것도 아니고 해서...고등학교 때 자유시간이 부족한 게 좀 답답하더라고."

 

(나) "그럴 수 있지. 나도 그랬으니까. 쳇바퀴처럼 계속 똑같이 공부하고, 모의고사 보고, 시험 보고, 수련생활하는 것 같았어."

 

(가람) "맞아. 그걸 1년 더 해야한다니~~! 휴. 이런 생각 그만해야지. 그러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나) "좋게 생각해. 더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준비정도?? 그리고 1년 뒤에 가면 오히려 더 재밌을 거야."

 

(가람) "그래, 오늘 여러모로 좋은 얘기 많이 해줘서 고마워. 다온이 너는 착한 사람 같아. 나를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도와주고...."

 

(나) "네가 하늘이 친구이기도 하고, 나도 언어영역 때문에 엄청 고생했었거든. 그 마음이 뭔지 잘 알아서...더 도와주고 싶더라고"

 

(가람) "그렇구나. 혹시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다음에 도와줄게."

 

(나) "어, 고마워. 나중에 필요할 때 연락하면 연락 씹지 않기다. 약속?" 나는 웃으면서 새끼 손가락을 가람이에게 건냈다.

 

(가람) "응, 약속." 가람이도 웃으면서 내 새끼 손가락에 본인의 새끼 손가락을 엮는다.

 

 

우리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음식을 다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니 시간이 꽤 늦었다. 시간은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카페를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가람이를 데려다주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가람이를 보내기에는 아쉬운 느낌. 조금이라도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 이 기분 좋음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여러 가지 감정들이 섞였다. 

 

 

(나) "집은 걸어가면 되는 거야?"

 

(가람) "어....버스 타도 되고, 걸어가도 되고..? 너는?"

 

(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어두워서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잖아. 요새 세상이 흉흉해."

 

(가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오늘 오답노트도 주고 같이 책도 봐주고 그랬는데 데려다주기까지 하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나) "아니야, 대신 내가 돈까스 얻어먹었잖아. 히힛. 그럼 걸어가자."

 

(가람) "으..응."

 

 

나와 가람이는 가람이 집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람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어렸을 때 친구 때문에 한 번 왔던 적이 있었다. 어렴풋이 가는 길이 기억에 날 듯 말 듯 했다.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가람이와 걸어가는 그 길이 예뻐보였다. 분명 어렸을 때도 같은 길을 걸었을 텐데 그 때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포장된 인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주변에는 큰 나무들과 함께 조그마한 풀숲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불빛에 비친 나무들과 풀들의 그림자가 인도를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히 자동차 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들. 자동차 소리와 겹쳐서 들리는 가람이의 구두 소리. 인도 위를 껴안고 걸어다니는 커플.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면서 보이고 들렸던 것들이 오늘은 왠지 모르게 아름답게,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와 가람이는 20분쯤 걸으면서 얘기하다보니 가람이네 아파트 쪽에 도착했다. 나는 가람이네 아파트를 보자마자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 속도를 조금씩 늦췄다. 가람이도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가도, 가람이가 사는 아파트와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가람) "도착했어, 다온아."

 

(나)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네. 혼자서 오면 좀 먼 거리인데, 같이 와서 그런지 금방 도착하는 느낌이야."

 

(가람) "그러게, 나도 백화점에서 우리집까지는 좀 멀어서 보통은 버스로만 다녔는데...얘기할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런가 금방 도착했네."

 

(나) "하핫. 나랑 생각이 똑같나보네. 그냥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오늘 즐거웠어. 가람아."

 

(가람) "응~ 나도 덕분에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스트레스 풀리기도 했고! 좋은 수험 정보도 얻고! 여러 모로 좋기도 하고 즐거웠어."

 

(나) "그랬다니 다행이다. 나는 네가 하늘이 친구라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가람) "그런 생각을 왜 해. 그런거 아니야. 후...이제 들어가야겠다. 너도 더 늦게 가면 버스 놓쳐."

 

(나) "아..그래. 그럼 잘 들어가고...음...."

 

(가람) "응? 왜?"

 

(나) "아니, 혹시 그냥...다음에 한 번 더 밥 먹고 놀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아니 꼭 밥이 아니더라도..하핫"

 

(가람) "아....당연히 가능하지.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해. 다음에 또 연락해. 대신 재수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놀자. 이번에는 대학교 꼭 갔으면 해서."

 

(나) "그건 당연하지. 나도 네가 꼭 원하는 대학교 갔으면 좋겠어.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 잘 들어가~!"

 

(가람) "어~ 너도 잘 가."

 

 

나는 아파트 엘레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가람이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가람이가 나를 향해 돌아보고 인사를 한 번 더 해주면 좋았을걸...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가람이를 보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가람이의 여러 모습들이 떠올랐다. 교도문고에서 같이 수험서를 고르면서 웃는 모습, 돈까스를 칼로 자르던 모습, 한 입에 돈까스를 먹던 모습, 신이 나서 학창시절을 얘기하던 모습, 새끼 손가락으로 약속했던 모습, 돌아가는 길 위에 있는 가로등에 비친 옆모습, 마지막에 인사해주는 모습. 

 

 

이 모든 모습들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하면서 나를 쳐다보는 가람이의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초롱초롱한 가람이의 눈빛. 그 초롱초롱한 눈빛과 인사하면서 웃는 가람이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집에 들어와도 가람이가 계속 생각났다. 몸은 피곤해서 잠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다음에 어떻게 하면 또 만날 수 있을까?', '또 보고싶다.' 이런 생각과 마음이 머릿 속을 지배했다. 

 

 

이제 막 20살이 되는 나에게는 처음이었다. 이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다. 단순하게 이성을 좋아한다 수준의 감정인 줄 알았다. 잘 몰랐고 서툴렀다. 이게 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강렬했던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도.